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왜구(倭寇)의 근원지 대마도(對馬島) 정벌

by 신나는 인생4 2023. 1. 20.

왜구의 침탈

왜구란 일반적으로 약탈을 일삼는 일본의 해적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 왜구는 통교가 단절되어 상인으로서 활동이 불가능할 때는 왜구집단으로서 인접국가에 침입하여 살인, 약탈, 방화 등의 행위를 하지만,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는 무역 상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런 왜구들의 약탈행위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393년 신라 내물왕 때 신라의 궁성을 침략했다는 기록과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왜구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랜 기간 왜구의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왜구는 13세기부터 고려 및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약탈과 파괴행위를 자행함으로써 한반도의 왕조에게는 지속적인 골칫거리였다. 특히 1350(충정왕 1)부터 본격화한 왜구의 침탈행위는 고려 멸망의 한 요인으로 꼽힐 만큼 심각한 피해와 타격을 주었는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탈을 피할 수 있었던 곳이 것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피해가 극심했다.

 

왜구의 침탈에 대한 고려와 조선의 대응

지속되는 왜구의 침탈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고려는 외교적 교섭을 통한 사태 해결에 주력했는데, 왜구 근절을 위한 외교적 접근은 왜구의 주요 근거지인 대마도에서부터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막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략질에 대응하는 직접적이고 우선적인 대응은 당연히 무력적 응징도 병행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한 1350(충정왕 1) 이후의 기록에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왜구 진압 성과들이 즐비한데, 1376(우왕 2)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였고, 1380(우왕 6) 나세, 최무선이 진포에서 왜구를 대파하였으며, 1381(우왕 7)에는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침략해 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를 진압하는 차원을 넘어서 좀 더 근본적인 무력 대응으로 왜구의 주요 근거지인 대마도에 대한 토벌론도 제기되어 1389(공양왕 1)에는 경상도원수 박위가 병선 1백 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적선 3백 척과 가옥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 초기 조선의 왜구 대책은 고려 말의 정책을 이어가면서도 수군의 정비와 전투력 증강을 통한 해상 방어체제를 충실화하여 연해지역에 대한 수군의 강력한 방어로 왜구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 막부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금제(禁制, 약탈을 못하도록 말리는 행위)를 요청하는 외교적 노력과 더불어 항복하거나 육지로 들어오는 왜구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적극적인 온건, 포섭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대일정책의 성과물로 1399(정종 1)에는 대마도총관 종정무가 토산물과 말 6필을 바치면서 왜구 행위의 근절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비인현 왜구사건(庇仁縣 倭寇事件)과 기해동정(己亥東征)

 

태조 이후 지속된 조선의 대일정책 성과로 왜구의 침탈이 확연히 근절되었으나, 1418(태종 18) 대마도에서 상당한 통제력을 발휘하던 도주 종정무가 죽자 내분이 일어났다. 내분으로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지고 극심한 식량과 물자 부족에 고통받던 대마도인들은 다시 왜구가 되어 조선의 연안을 침입했다. 1419(세종 1) 왜구는 50여 척의 배로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노략질을 하고 이어서 황해도 연평도를 재차 침입한 후에 명나라의 요동반도로 진출하는 이른바 비인현 왜구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상왕(上王) 태종은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여 우환의 뿌리를 뽑겠다는 목적으로 대마도 정벌을 결심했는데, 왜구의 주력부대가 요동으로 빠져나간 틈을 타서 대마도를 정벌하면 승산이 높고 정벌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419(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가 병력 17,285명과 65일치 군량을 준비하여 병선 227척에 승선하여 거제도를 출발,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후 10여 척의 선발대가 대마도를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는 등 서전에서 대승한 후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정벌군을 좌우로 나누어 대마도에 상륙시켜 토벌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군절제사 박실이 매복 중이던 대마도군에 습격당하여 패전하였지만, 우군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의 선전으로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1,939호의 가옥과 1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당시 대마도의 실권자로서 도주의 숙부인 도도웅와(都都熊瓦)가 군사의 철수와 수호를 간청하여 이종무는 공격을 중단하고 군을 이끌고 거제도로 귀환함으로써 조선의 대마도 정벌을 일컫는 기해동정이 마무리되었다.

 

14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기해동정은 조선과 왜군을 합하여 3,8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은 이 정벌전을 통하여 왜구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전과를 얻었지만, 왜구의 주력 부대가 섬에 없었으므로 왜구를 섬멸한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왜구가 반격을 가해오자 철군 직후 곧장 재정벌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조정의 찬반 논의에서 태풍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때마침 김해에서 도독 유강이 요동에서 돌아오던 왜구를 대파했다는 소식으로 태종이 재정벌의 뜻을 거둠으로써 논의는 종결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