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은 시라무렌강 유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던 유목 민족인데,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대륙의 북방 초원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라는 통치자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웠다. 이때의 한반도는 고려가 건국하기 2년 전이므로 후삼국 시대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시기인데, 이후 거란은 동쪽의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남쪽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교류, 갈등하며 북방의 강자로 등극했다.
거란과의 단교를 선언한 왕건
그러나 고려는 942년에 거란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와 우호를 맺고 있다가 갑자기 배반하여 멸망시켰음을 지적하고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사신단을 섬에 유배하고 이들이 데려온 낙타는 만부교 다리 아래에 매어두어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이 터진다. 이어 943년에는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거란은 짐승 같은 나라며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문물제도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는 한편, “강력하고 악한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도록 하라”는 권고를 남겼다. 이후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50여 년 동안 단절되었다.
거란의 1차 고려 침공
10세기 후반 5대 10국의 혼란기가 끝나고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북방의 거란과 남방의 송이 직접 대립하는 형세가 펼쳐졌다. 송은 과거 후진이 거란에게 내어주었던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고려 성종 5년인 986년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거란을 공격하였다. 당시 송은 고려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협공을 제안했지만 고려는 군대를 출병시키지 않았다. 이 공격은 결국 송의 큰 패배로 끝났으며, 이후 송은 거란에 대해 계속 수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동쪽으로 미쳐 거란은 동쪽의 여진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압록강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발해의 후예들이 세워 압록강 유역에 존재했던 정안국도 이 과정에서 멸망당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거란은 991년(성종 10년)에 압록강 하류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요충지를 차지함으로써 전략적인 우세를 차지하였다.
당시 고려는 성종이 즉위한 이후 내치에 집중하던 시기였는데, 993년 거란은 동경유수 소항덕의 지휘 하에 80만 대병이라 일컬으며 1차 고려 침입을 감행했다. 고려는 첫 전투에서 패하여 봉산군을 잃고 선봉인 윤서안이 잡혀가는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후 안융진에서 방어에 성공하고 서희가 협상에서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거란이 제기했던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요구를 차단하고 아직 통제력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압록강 동쪽 지역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통제력을 확보하고, 군사적 요충지를 설치하였다. 당시 거란이 고려를 공격했던 가장 큰 이유가 송과 고려의 연계를 끊으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종전의 조건으로 거란의 요구에 따라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란의 2차 고려 침공
1차 침공 이후 고려와 거란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된 가운데, 거란은 송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제압하여 매년 거란에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며, 송의 황제가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기로 하는 ‘전연의 맹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송을 제압한 거란이 고려에 대해 한층 압박을 가할 명분이 필요한 때인 1009년(목종 12년) 고려에 이른바 ‘강조의 정변’이 발생했다. 아직 젊고 아들이 없었던 제7대 국왕 목종이 병이 들면서 후계자 선정이 문제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강조라는 장수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 시해하고 새로 현종을 옹립했던 것이다. 거란의 황제 성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역을 일으킨 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고려 침공을 지시하고, 1010년(현종 원년) 11월 성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이라 칭하며 고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에서 벌어졌다.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을 지키며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으로 개경을 향해 내려갔다. 일차적으로는 고려가 성공적인 방어를 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흥화진을 우회한 거란군이 다음으로 마주친 곳은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인 통주였다. 강조는 초반에 잘 방어하였지만, 후반에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통주전투에서 강조뿐만 아니라 부장 이현운 등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흩어졌으나, 다행히 통주성은 함락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무너지면서 고려군의 전열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비록 서경은 힘겨운 전투 끝에 지켜낼 수 있었지만 거란군이 개경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려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현종은 결국 친조,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거란군도 후방에 잔류한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요청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란군의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양규를 비롯하여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수많은 포로를 구출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비록 양규가 전투 도중 목숨을 잃는 등 고려의 피해도 컸으나, 끝까지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거란의 3차 고려 침공
2차 침공이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고려 측에서 현종의 병환으로 인하여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보를 하여 거란의 성종은 크게 분노했다. 거란은 고려에 강동 6주 지역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으려는 국지적인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수차례에 걸친 공격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거란 성종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고려 공격을 준비했다. 1018년(현종 9년)에 거란은 소배압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 고려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그 휘하에 약 20만 8천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곳을 피하여 개경으로 향하자, 강감찬은 그 길목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계속 습격하는 한편, 급히 개경으로 1만의 군사를 보내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동북면에서 온 3천 3백의 군사들도 개경 방어에 합류하여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현종이 성 밖의 백성들을 전부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청야전술을 펼치며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소배압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을 습격하려 했으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으며 상당한 전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 인근까지 접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척후로 보냈던 기병 3백이 금교역에서 고려군에게 전멸당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변변한 거점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한반도 깊숙이 들어왔던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고려군은 연주와 위주 일대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어 1019년(현종 19년) 2월의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소배압이 귀양형에 처해질 정도였으니, 그 패배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거란의 침입 이후 높아진 고려의 국제적 위상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한층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거란도 고려를 힘으로 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거란에게 압박을 당했던 송은 고려의 국력을 재평가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재편 속에서 고려는 거란 및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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